2020.6.19 유익하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관리자 관리자님의 홈 전체게시물 아이디로 검색 관리자님의 홈 전체게시물 아이디로 검색 2020.06.18 07:32 7,311 3 LV.16 4%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고린도전서 12:1-12:11 내려받기 댓글목록 3 괜찮아그럴수있지님의 댓글 괜찮아그럴수있지 괜찮아그럴수있지님의 홈 전체게시물 아이디로 검색 괜찮아그럴수있지님의 홈 전체게시물 아이디로 검색 2020.06.18 08:31 수고많으세요..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수고많으세요..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새힘님의 댓글의 댓글 새힘 새힘님의 홈 전체게시물 아이디로 검색 새힘님의 홈 전체게시물 아이디로 검색 2020.06.18 14:38 오늘 본문 말씀을 못들어서 아쉽네요!!! 얼마 전부터 우리 구역은 큐티를 하고 본분을 내려받기해서 공유하고 있습니다^^^ 담임 목사님 설교말씀도 박진문 목사님 말씀도 참 좋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문제들을 우리교회와 구역, 일상에서 생각해보고 적용하는데 큰 유익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못들어서 아쉽네요!!! 얼마 전부터 우리 구역은 큐티를 하고 본분을 내려받기해서 공유하고 있습니다^^^ 담임 목사님 설교말씀도 박진문 목사님 말씀도 참 좋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문제들을 우리교회와 구역, 일상에서 생각해보고 적용하는데 큰 유익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괜찮아그럴수있지님의 댓글 괜찮아그럴수있지 괜찮아그럴수있지님의 홈 전체게시물 아이디로 검색 괜찮아그럴수있지님의 홈 전체게시물 아이디로 검색 2020.06.18 08:37 (고린도전서 11:17-34, 무엇을 기억하는가) 고린도교회에서는 주의 만찬과 관련하여서도 “분쟁”이 있었다. 지도자 중심으로 이른바 ‘성찬식’의 신학적 이해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을 단순한 식사로 생각하고 그저 먹고 마시는 일이 되어버리고, 더구나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차별되고 결국 배부른 자와 먹지 못하는 자로 “파당”이 생기기까지 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누었던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를 그대로 재현하려 한 것인가? 이들은 배를 채우는 식사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먼저 다 먹어서 나중에 못 먹는 사람이 생기고, 심지어는 포도주에 취하도록 마신 사람도 있었다. 가관이었다! 예수께서는 ‘식사’를 기념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 식사는 매 끼니마다 하는 일이다. 그것은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기념하라고 하신 자리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바로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다. 우리말 “기념”이 왠지 행사와 관련된 어감으로 들린다면 ‘기억’이라는 단어를 이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나를 기억하라’,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라’ 이것은 식사하는 김에 예수의 십자가도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죽음의 의미만을 기억하도록 이 자리를 마련하라는 뜻이다. 그 시간에 기념(기억)할 것은 예수께서 나를 위해 살이 찢기신 사실이며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사실이다. 그것은 그냥 막연한 추상적 생각(묵상)이 아니라 실제 내 입에 떡과 잔을 넣고 치아로 십고 목구멍으로 넘기는 ‘실물교육’, ‘시청각’적 재현이다. 그 사실만을 기억하고 그에 집중하기 위해, 시장기를 해소하는 식사의 자리가 아니라 별도의 ‘예배’로서 참으로 감사하고 엄숙하게 떡과 잔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이 기념은 나 혼자만의 자리가 아니라 교회가 함께 나누는 공동체적 기억 행위다. 그것은 단지 한 사회자의 진행에 따른 행사가 아닐 것이다. 거기서 당연히 믿음의 고백과 나눔이 있었을 것이다. 분명 오늘날의 예배 중 형식적 순서와는 다른 특별한 자리일 것이다. 나는 오래 전 어느 교회에서 그러한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따로 ‘주의 만찬’의 자리를 가졌고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만 미리 신청하여 모였고, 거기서 원하는 사람은 믿음을 나눴다. 그러한 자리가 있으면 참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일을 준비하는 마음이 더 중요할 것이다. 바울은 먼저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고 했다. 그저 시장기 해소를 위해 모여 배를 채우는 데 급급했던 모습 속에는 그러한 준비, 즉 미리 살핌이 없었을 것이다. 혹시 다른 사람보다 먼저 도착하기 위해 서두른 것 외에 무슨 준비가 필요했겠는가. 오늘은 얼마큼 먹을까, 오늘은 지난번보다 더 먹어야지 하는 생각만 하지 않았을까. 사실은 오늘날 “주의 죽으심”을 깊이 묵상하고 미리 자신을 살피지 않고 형식적인 ‘성찬식’을 치르는 것도 준비 없음에서는 그와 똑같다. 주의 만찬의 자리에서 기억하는 “주의 죽으심”은 단지 참여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하는 것”으로써 행해진다. “전하는 것”은 꼭 전도만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 만찬의 자리에서 옆의 형제와 “주의 죽으심”에 대해서 감사를 나누고 기도하는 것도 “전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 함께한 형제와의 이러한 ‘전함’, 즉 ‘나눔’도 못하면서 사역적 활동으로서 ‘전도’만을 생각할 것은 아니다. 요즘은 교회에서 ‘주의 만찬’의 시간을 갖는 것이 매우 드물다. 다음 시간에는 형제와 “주의 죽으심”을 나누고 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이 일을 제대로 못한다면 주의 만찬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 앞 다퉈 내 배 채우기에 급급한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고린도전서 11:17-34, 무엇을 기억하는가) 고린도교회에서는 주의 만찬과 관련하여서도 “분쟁”이 있었다. 지도자 중심으로 이른바 ‘성찬식’의 신학적 이해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을 단순한 식사로 생각하고 그저 먹고 마시는 일이 되어버리고, 더구나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차별되고 결국 배부른 자와 먹지 못하는 자로 “파당”이 생기기까지 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누었던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를 그대로 재현하려 한 것인가? 이들은 배를 채우는 식사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먼저 다 먹어서 나중에 못 먹는 사람이 생기고, 심지어는 포도주에 취하도록 마신 사람도 있었다. 가관이었다! 예수께서는 ‘식사’를 기념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 식사는 매 끼니마다 하는 일이다. 그것은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기념하라고 하신 자리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바로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다. 우리말 “기념”이 왠지 행사와 관련된 어감으로 들린다면 ‘기억’이라는 단어를 이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나를 기억하라’,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라’ 이것은 식사하는 김에 예수의 십자가도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죽음의 의미만을 기억하도록 이 자리를 마련하라는 뜻이다. 그 시간에 기념(기억)할 것은 예수께서 나를 위해 살이 찢기신 사실이며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사실이다. 그것은 그냥 막연한 추상적 생각(묵상)이 아니라 실제 내 입에 떡과 잔을 넣고 치아로 십고 목구멍으로 넘기는 ‘실물교육’, ‘시청각’적 재현이다. 그 사실만을 기억하고 그에 집중하기 위해, 시장기를 해소하는 식사의 자리가 아니라 별도의 ‘예배’로서 참으로 감사하고 엄숙하게 떡과 잔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이 기념은 나 혼자만의 자리가 아니라 교회가 함께 나누는 공동체적 기억 행위다. 그것은 단지 한 사회자의 진행에 따른 행사가 아닐 것이다. 거기서 당연히 믿음의 고백과 나눔이 있었을 것이다. 분명 오늘날의 예배 중 형식적 순서와는 다른 특별한 자리일 것이다. 나는 오래 전 어느 교회에서 그러한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따로 ‘주의 만찬’의 자리를 가졌고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만 미리 신청하여 모였고, 거기서 원하는 사람은 믿음을 나눴다. 그러한 자리가 있으면 참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일을 준비하는 마음이 더 중요할 것이다. 바울은 먼저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고 했다. 그저 시장기 해소를 위해 모여 배를 채우는 데 급급했던 모습 속에는 그러한 준비, 즉 미리 살핌이 없었을 것이다. 혹시 다른 사람보다 먼저 도착하기 위해 서두른 것 외에 무슨 준비가 필요했겠는가. 오늘은 얼마큼 먹을까, 오늘은 지난번보다 더 먹어야지 하는 생각만 하지 않았을까. 사실은 오늘날 “주의 죽으심”을 깊이 묵상하고 미리 자신을 살피지 않고 형식적인 ‘성찬식’을 치르는 것도 준비 없음에서는 그와 똑같다. 주의 만찬의 자리에서 기억하는 “주의 죽으심”은 단지 참여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하는 것”으로써 행해진다. “전하는 것”은 꼭 전도만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 만찬의 자리에서 옆의 형제와 “주의 죽으심”에 대해서 감사를 나누고 기도하는 것도 “전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 함께한 형제와의 이러한 ‘전함’, 즉 ‘나눔’도 못하면서 사역적 활동으로서 ‘전도’만을 생각할 것은 아니다. 요즘은 교회에서 ‘주의 만찬’의 시간을 갖는 것이 매우 드물다. 다음 시간에는 형제와 “주의 죽으심”을 나누고 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이 일을 제대로 못한다면 주의 만찬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 앞 다퉈 내 배 채우기에 급급한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댓글목록 3
괜찮아그럴수있지님의 댓글
수고많으세요..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새힘님의 댓글의 댓글
오늘 본문 말씀을 못들어서 아쉽네요!!!
얼마 전부터 우리 구역은 큐티를 하고 본분을 내려받기해서 공유하고 있습니다^^^
담임 목사님 설교말씀도 박진문 목사님 말씀도 참 좋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문제들을 우리교회와 구역, 일상에서 생각해보고 적용하는데 큰 유익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괜찮아그럴수있지님의 댓글
(고린도전서 11:17-34, 무엇을 기억하는가)
고린도교회에서는 주의 만찬과 관련하여서도 “분쟁”이 있었다.
지도자 중심으로 이른바 ‘성찬식’의 신학적 이해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을 단순한 식사로 생각하고 그저 먹고 마시는 일이 되어버리고,
더구나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차별되고 결국 배부른 자와 먹지 못하는 자로
“파당”이 생기기까지 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누었던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를 그대로 재현하려 한 것인가?
이들은 배를 채우는 식사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먼저 다 먹어서 나중에 못 먹는 사람이 생기고,
심지어는 포도주에 취하도록 마신 사람도 있었다.
가관이었다!
예수께서는 ‘식사’를 기념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
식사는 매 끼니마다 하는 일이다.
그것은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기념하라고 하신 자리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바로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다.
우리말 “기념”이 왠지 행사와 관련된 어감으로 들린다면
‘기억’이라는 단어를 이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나를 기억하라’,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라’
이것은 식사하는 김에 예수의 십자가도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죽음의 의미만을 기억하도록 이 자리를 마련하라는 뜻이다.
그 시간에 기념(기억)할 것은 예수께서 나를 위해 살이 찢기신 사실이며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사실이다.
그것은 그냥 막연한 추상적 생각(묵상)이 아니라
실제 내 입에 떡과 잔을 넣고 치아로 십고 목구멍으로 넘기는 ‘실물교육’, ‘시청각’적 재현이다.
그 사실만을 기억하고 그에 집중하기 위해,
시장기를 해소하는 식사의 자리가 아니라 별도의 ‘예배’로서 참으로 감사하고 엄숙하게 떡과 잔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이 기념은 나 혼자만의 자리가 아니라 교회가 함께 나누는 공동체적 기억 행위다.
그것은 단지 한 사회자의 진행에 따른 행사가 아닐 것이다.
거기서 당연히 믿음의 고백과 나눔이 있었을 것이다.
분명 오늘날의 예배 중 형식적 순서와는 다른 특별한 자리일 것이다.
나는 오래 전 어느 교회에서 그러한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따로 ‘주의 만찬’의 자리를 가졌고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만 미리 신청하여 모였고,
거기서 원하는 사람은 믿음을 나눴다.
그러한 자리가 있으면 참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일을 준비하는 마음이 더 중요할 것이다.
바울은 먼저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고 했다.
그저 시장기 해소를 위해 모여 배를 채우는 데 급급했던 모습 속에는
그러한 준비, 즉 미리 살핌이 없었을 것이다.
혹시 다른 사람보다 먼저 도착하기 위해 서두른 것 외에 무슨 준비가 필요했겠는가.
오늘은 얼마큼 먹을까, 오늘은 지난번보다 더 먹어야지 하는 생각만 하지 않았을까.
사실은 오늘날 “주의 죽으심”을 깊이 묵상하고 미리 자신을 살피지 않고
형식적인 ‘성찬식’을 치르는 것도 준비 없음에서는 그와 똑같다.
주의 만찬의 자리에서 기억하는 “주의 죽으심”은 단지 참여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하는 것”으로써 행해진다.
“전하는 것”은 꼭 전도만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 만찬의 자리에서 옆의 형제와 “주의 죽으심”에 대해서 감사를 나누고 기도하는 것도 “전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 함께한 형제와의 이러한 ‘전함’, 즉 ‘나눔’도 못하면서
사역적 활동으로서 ‘전도’만을 생각할 것은 아니다.
요즘은 교회에서 ‘주의 만찬’의 시간을 갖는 것이 매우 드물다.
다음 시간에는 형제와 “주의 죽으심”을 나누고 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이 일을 제대로 못한다면 주의 만찬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
앞 다퉈 내 배 채우기에 급급한 모습과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