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어야 은혜를 누립니다.
2023.03.3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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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기독교는 식사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함께 먹는 일>이 중요합니다. 구약 시대 성막이나 성전에서 공식적인 예배/제사를 드릴 때 마지막 순서는 화목제였습니다. 아시다시피 화목제는 하나님과 제사장, 제물을 바친 사람들이 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였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은 당일, 그 외 서원함으로 드리는 제물은 이튿날까지 반드시 먹어 없애야만 했기 때문에 화목제 식사는 필수적으로 이웃을 초대해서 함께 먹을 수밖에 없는 잔치였습니다. 요컨대 함께 먹지 않는 제사는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묘사할 때 독특한 표현이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말입니다(행2:46). 예배는 떡을 떼기 위한 모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행20:7). 함께 먹는 것이 모임의 목표가 될 만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전통이 교회 안에 성찬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교회와 성도들의 규모가 커지면서,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상대적으로 ‘떡과 잔’이 작아지게 되었지만 성찬식의 본래 형태는 <공동식사>였음이 틀림없습니다. “함께 먹는 일”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셨지만(마11:19), “함께 먹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서 “함께 먹는 일”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고대근동의 문화적 맥락에서 “함께 먹는 일”이 서로를 동료로 받아 주는 과정이요, 친구가 되어 서로를 지켜주겠노라는 언약적(?)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문화에서 “한솥밥” 먹는다고 할 때 함축하는 것과 비슷한, 어쩌면 그보다 더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는 것이 “함께 먹는 일”이었습니다.
“함께 먹는 일”이 중요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먹을 것이 대체로 부족했던 고대사회에서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이 의미하는 즐거움 때문입니다. “함께 먹는 일”이야말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근원적인 행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의 소망은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일이요(사25:6),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해 준비한 혼인잔치에(마22:2) 참여하는 일로 비유되기까지 합니다. 요컨대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함께 먹고 마시면서’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미리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먹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지만 여기에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누가 비용을 내고, 누가 음식을 장만하며, 또 누가 설거지를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 이런 문제 때문에 갈등이 일어난 사례를 고린도전서 11장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누구와 함께 먹고 마실 것이냐는 것입니다. 요즘 ‘혼밥’이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부득이한 일이요 모든 식사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함께 할 때 즐거운 법입니다. 고대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들과 같은 신분, 같은 지위와 품격을 갖춘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함께 먹고 마실 때,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을 함께 먹고 마시는 일에 초대했습니다. 사람들을 먹는 자리에 초청하고 음식 값을 대고(행6:1), 봉사하는 일을 교회 직분의 하나로 만들었습니다(행6:2). 더 나아가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보다 더 연약하고 가련한 사람들을 잔치 자리로 초대하는 것을 더 귀한 일로 여겼습니다(마9:11-13). 신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던 시대,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을 통해서 사람 사이의 장벽을 쌓던 세상을 도전하고 대항하면서 복음 안에 스며있는 생명의 능력과 즐거움을 만끽 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처럼 일상적인 일이 없지만, ‘먹고 마시는 일’에 강력한 신앙고백이 배어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흥왕하려면 우리 안에 ‘먹고 마시는 잔치’를 자주 벌여야 합니다. 함께 먹고 마시면서 은혜와 복을 누리고 나누면서, 천국의 잔치를 소망하는 즐거움이 우리 안에 넘쳐 나기를 바랍니다. (박용태목사)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묘사할 때 독특한 표현이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말입니다(행2:46). 예배는 떡을 떼기 위한 모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행20:7). 함께 먹는 것이 모임의 목표가 될 만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전통이 교회 안에 성찬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교회와 성도들의 규모가 커지면서,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상대적으로 ‘떡과 잔’이 작아지게 되었지만 성찬식의 본래 형태는 <공동식사>였음이 틀림없습니다. “함께 먹는 일”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셨지만(마11:19), “함께 먹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서 “함께 먹는 일”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고대근동의 문화적 맥락에서 “함께 먹는 일”이 서로를 동료로 받아 주는 과정이요, 친구가 되어 서로를 지켜주겠노라는 언약적(?)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문화에서 “한솥밥” 먹는다고 할 때 함축하는 것과 비슷한, 어쩌면 그보다 더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주는 것이 “함께 먹는 일”이었습니다.
“함께 먹는 일”이 중요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먹을 것이 대체로 부족했던 고대사회에서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이 의미하는 즐거움 때문입니다. “함께 먹는 일”이야말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근원적인 행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의 소망은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일이요(사25:6),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해 준비한 혼인잔치에(마22:2) 참여하는 일로 비유되기까지 합니다. 요컨대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함께 먹고 마시면서’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미리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먹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지만 여기에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누가 비용을 내고, 누가 음식을 장만하며, 또 누가 설거지를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 이런 문제 때문에 갈등이 일어난 사례를 고린도전서 11장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누구와 함께 먹고 마실 것이냐는 것입니다. 요즘 ‘혼밥’이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부득이한 일이요 모든 식사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함께 할 때 즐거운 법입니다. 고대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들과 같은 신분, 같은 지위와 품격을 갖춘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함께 먹고 마실 때,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을 함께 먹고 마시는 일에 초대했습니다. 사람들을 먹는 자리에 초청하고 음식 값을 대고(행6:1), 봉사하는 일을 교회 직분의 하나로 만들었습니다(행6:2). 더 나아가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보다 더 연약하고 가련한 사람들을 잔치 자리로 초대하는 것을 더 귀한 일로 여겼습니다(마9:11-13). 신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던 시대,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을 통해서 사람 사이의 장벽을 쌓던 세상을 도전하고 대항하면서 복음 안에 스며있는 생명의 능력과 즐거움을 만끽 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처럼 일상적인 일이 없지만, ‘먹고 마시는 일’에 강력한 신앙고백이 배어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흥왕하려면 우리 안에 ‘먹고 마시는 잔치’를 자주 벌여야 합니다. 함께 먹고 마시면서 은혜와 복을 누리고 나누면서, 천국의 잔치를 소망하는 즐거움이 우리 안에 넘쳐 나기를 바랍니다. (박용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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