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과 심판
2022.11.24 17:43
3,968
0
0
본문
세상에는 생각지 못한 고통과 아픔에 시달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위로가 필요하고 응원이 필요하고 회복과 치유가 필요합니다. 설령 그 고통과 아픔이 자기 잘못 때문에 치르는 대가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손길이 필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에서 죄로 고통당하는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실 정도로 뜨거운 마음을 가진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예배하는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향해 냉혹한 언사를 내뱉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얼마 전 이태원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있었습니다.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벚꽃이 필 때는 세월호를 생각해야 하고,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 때면 이태원을 생각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재난을 만나거나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재난을 당할 때 그것이 반드시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요9:1-3). 죽임당한 후에조차 빌라도에 의해 갈릴리 사람들이 모욕을 받았을 때, 그리고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치어 죽었을 때 예수님은 그런 비참한 일이 모욕을 당하거나 무너진 망대에 치어 죽은 사람들의 죄 때문이라고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그런 재난, 비참한 고통을 겪으면서 <회개>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3,5> 선언 하십니다. 재난을 당한 사람에게 심판은 아니라 할지라도 세상에 점점 잔인한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 멀쩡한 건물이 무너지거나, 안전해야 할 장소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으면 안될 죄 때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21장을 보면 3년 기근이 닥친 적이 있습니다. 원인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했기 때문입니다. 학살당한 기브온 사람, 그리고 3년 기근에 시달렸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엄청난 재난이었습니다. 그 재난은 기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자기 죄 때문에 당한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기근은 억울하고 원통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지 않았던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사무엘하 24장에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는 바람에 전염병이 생겨서 7만 명이 죽은 일이 있습니다. 죄는 다윗이 지었는데, 고통은 백성들이 당한 것입니다. 전염병 때문에 죽임당한 개개인들에게 전염병은 재난이었지만 심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염병은 악하고 어리석은 통치자를 두었던 백성들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코로나로 고생하는 분들에게 코로나는 재앙이지 심판은 아닙니다. 그러나 코로나는 더 화려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생태계의 질서를 무너뜨린 현대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어느 누구도 재앙과 심판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회개가 필요합니다. 더 화려하고 도 풍요로운 삶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면서, 애굽에서 광야로, 화려하고 풍요로웠던 바벨론/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서는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세월호든 이태원이든,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재난입니다. 그러나 심판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태원 참사 앞에서 단순한 애도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회개가 필요합니다. 어쩌면 이 일이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책임한 권력자를 선택한 우리 사회에 대한 심판은 아닐지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누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인지, 제대로 분별해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재난 속에 고통당하는 사람의 한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재난은 한번으로 끝나야지, 그것이 무분별한 세상에 대한 심판으로 발전하도록 버려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을, 이 땅의 조국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만 빕니다. (박용태목사)
얼마 전 이태원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있었습니다.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벚꽃이 필 때는 세월호를 생각해야 하고,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 때면 이태원을 생각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재난을 만나거나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재난을 당할 때 그것이 반드시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요9:1-3). 죽임당한 후에조차 빌라도에 의해 갈릴리 사람들이 모욕을 받았을 때, 그리고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치어 죽었을 때 예수님은 그런 비참한 일이 모욕을 당하거나 무너진 망대에 치어 죽은 사람들의 죄 때문이라고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그런 재난, 비참한 고통을 겪으면서 <회개>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3,5> 선언 하십니다. 재난을 당한 사람에게 심판은 아니라 할지라도 세상에 점점 잔인한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 멀쩡한 건물이 무너지거나, 안전해야 할 장소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으면 안될 죄 때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21장을 보면 3년 기근이 닥친 적이 있습니다. 원인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했기 때문입니다. 학살당한 기브온 사람, 그리고 3년 기근에 시달렸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엄청난 재난이었습니다. 그 재난은 기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자기 죄 때문에 당한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기근은 억울하고 원통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지 않았던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사무엘하 24장에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는 바람에 전염병이 생겨서 7만 명이 죽은 일이 있습니다. 죄는 다윗이 지었는데, 고통은 백성들이 당한 것입니다. 전염병 때문에 죽임당한 개개인들에게 전염병은 재난이었지만 심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염병은 악하고 어리석은 통치자를 두었던 백성들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코로나로 고생하는 분들에게 코로나는 재앙이지 심판은 아닙니다. 그러나 코로나는 더 화려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생태계의 질서를 무너뜨린 현대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어느 누구도 재앙과 심판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회개가 필요합니다. 더 화려하고 도 풍요로운 삶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면서, 애굽에서 광야로, 화려하고 풍요로웠던 바벨론/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서는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세월호든 이태원이든,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재난입니다. 그러나 심판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태원 참사 앞에서 단순한 애도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회개가 필요합니다. 어쩌면 이 일이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책임한 권력자를 선택한 우리 사회에 대한 심판은 아닐지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누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인지, 제대로 분별해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재난 속에 고통당하는 사람의 한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재난은 한번으로 끝나야지, 그것이 무분별한 세상에 대한 심판으로 발전하도록 버려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을, 이 땅의 조국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만 빕니다. (박용태목사)
0
로그인 후 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