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칼럼

연약함은 부끄럽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 박용태목사(전주제자교회)

본문

세상은 크고 강하고 지혜롭고 화려한 것을 좋아합니다. 연약함을 수치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허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연약함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이나 자신의 잘못, 상처를 마냥 감추려고 하지만 않습니다.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지만, 그러나 일부러 감추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연약함이 허물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원리로 보자면(롬5:20), 허물과 연약함은 은혜의 크기, 깊이, 신비를 드러내는 발판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허물과 연약함을 뻔뻔스럽게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연약하다고 해서 무능하고 무기력한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연약함으로 따지자면 예수님만한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아기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크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철저하게 무기력하고, 철저하게 무능한 모습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연약한 우리를 보듬어 주시고 연약한 우리를 영원한 영광 가운데로 이끌어 가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연약함으로부터 해방하사 하늘의 영광으로 인도하시려고 연약함을 짊어진 채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히4:15-16).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을 일러 <그리스도의 비하>라고 합니다. 본래 하나님이셨던 성자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셨을 때, 더 나아가 마침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음을 맛보셨을 때 한 없이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초라함, 그런 연약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몸에 새겨진 십자가의 상처는 연약함의 흔적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여전히 십자가의 상처가 남아 있었습니다. 고통과 아픔의 흔적, 상처 받은 흔적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연약함, 무능함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고 상처 받고 깨어진 삶의 흔적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구유에서 시작해서 십자가로 끝났던 것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초라하다 못해 조롱받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생은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순복하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연약함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 응답할 줄 모르는 것, 하나님께 순종할 줄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 연약함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연약함을 짊어지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영원한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연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연약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연약한 사람, 상처 입은 영혼들이 더러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연약한 인생을 조롱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연약함을 보듬어주며 싸매어 줍니다. 우리도 한 때 연약하고 소망 없는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연약함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사랑과 긍휼로 연약함을 감싸 내는 은혜를 더 지속적으로, 더 멀리까지 흘려보낼 수 있다면, 복음의 큰 능력을 더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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