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상윤목사(전주제자교회)
2019.07.25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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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에게 편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갈라디아 지역은 여러 도시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는 바울이 자신의 전도 여행에 항상 포함시킨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주 방문했던 교회에 다른 복음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에 바울은 분노합니다.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라는 표현 속에 바울의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무엇이었을까요?
복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 더하기 할례도 받아야 구원을 얻습니다’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주장을 하며, 바울이 개척한 교회에 다른 복음을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존경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엄히 명하신 규례였습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4). 할례가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할례가 없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가 바뀌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세례, ‘성령’ 세례였습니다.
세례는 회개의 의식입니다. 성령이 그 사람의 마음에 믿음을 주시고, 회개의 마음을 일으키십니다. 교회가 한참 일어서는 시기에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임하였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보여주셨습니다(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불의 혀의 형상, 제자들의 언어가 바뀜).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방식이었습니다. 보다 일반적인 방식은, 성령께서 복음을 듣는 자의 마음의 믿음을 일으키사 회개케 하시고, 세례를 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을 ‘인침’으로 묘사합니다(엡 1:13). 하나님의 택하심에는 후회가 없으십니다. 변개치 않으십니다. 인간 편에서는 헷갈리기도 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전혀 헷갈리지도 않고, 택하신 자를 한 명도 잃지 않고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례가 표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가 표지라고 한다면, 할례가 표지라고 하는 ‘다른 복음’과 다를 게 없습니다. ‘성령’이 표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이 ‘표지’입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믿는 자는 평안을 누립니다. 성령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표지가 있다면 그것은 ‘싸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라고 권면합니다(딤전 6:12).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동안 우리 안에서 육체와 성령의 싸움을 계속 될 것입니다(갈 5:16~17). 그러나 이 싸움이 없다면 그것은 성령이 없다는 표지일 수 있습니다. 내면의 싸움없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평안을 누리고자, 사람들은 할례 또는 세례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이며, 저주받을 일입니다(갈 1:9). 우리 안에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이 싸움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표지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 더하기 할례도 받아야 구원을 얻습니다’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주장을 하며, 바울이 개척한 교회에 다른 복음을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존경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엄히 명하신 규례였습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4). 할례가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할례가 없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가 바뀌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세례, ‘성령’ 세례였습니다.
세례는 회개의 의식입니다. 성령이 그 사람의 마음에 믿음을 주시고, 회개의 마음을 일으키십니다. 교회가 한참 일어서는 시기에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임하였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보여주셨습니다(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불의 혀의 형상, 제자들의 언어가 바뀜).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방식이었습니다. 보다 일반적인 방식은, 성령께서 복음을 듣는 자의 마음의 믿음을 일으키사 회개케 하시고, 세례를 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을 ‘인침’으로 묘사합니다(엡 1:13). 하나님의 택하심에는 후회가 없으십니다. 변개치 않으십니다. 인간 편에서는 헷갈리기도 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전혀 헷갈리지도 않고, 택하신 자를 한 명도 잃지 않고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례가 표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가 표지라고 한다면, 할례가 표지라고 하는 ‘다른 복음’과 다를 게 없습니다. ‘성령’이 표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이 ‘표지’입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믿는 자는 평안을 누립니다. 성령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표지가 있다면 그것은 ‘싸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라고 권면합니다(딤전 6:12).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동안 우리 안에서 육체와 성령의 싸움을 계속 될 것입니다(갈 5:16~17). 그러나 이 싸움이 없다면 그것은 성령이 없다는 표지일 수 있습니다. 내면의 싸움없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평안을 누리고자, 사람들은 할례 또는 세례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이며, 저주받을 일입니다(갈 1:9). 우리 안에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이 싸움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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