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와 사명을 위해 살아야합니다(박용태목사님)
2013.06.2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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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대의와 사명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박용태목사
서울의 대학가에서 학생대표기구를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학생회장을 하려는 학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선거기간에 입후보 하는 학생이 있어도 전체 투표율이 너무 낮아서 정당한 대표기구를 구성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미 여러 대학이 학생대표기구 없이 학사일정을 진행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그 기사를 쓴 기자는 요즘 대학생들이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어서 자신에게 직접 관련 있는 일이 아니라면 참여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분석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관심 있는 영역만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삶조차 무너뜨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나찌세력에 대항하던 마틴 니묄러 목사님이 쓴 <그들이 내게 왔을 때>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체포하고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 다음 그들이 나에게 들이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나서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의에 무관심한 채 자신의 행복과 개인적인 관심에만 매몰되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지를 고발하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행복보다는 대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내 행복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설령 내 행복, 내 기쁨을 포기하더라도 반드시 추구해야 할 더 가치 있는 일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 우리나라가 원전 건설과 유지 과정에서 온갖 부정과 비리가 오랫동안 저질러졌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연일 언론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원전이란 단순한 전력생산 시설이 아니라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에서 볼 수 있듯이 사고가 일어나면 그 지역 전체가 접근 불가능한 땅으로 변해 버릴 정도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처럼 엄청난 시설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비리가 저질러 진 것도 문제지만, 더 두려운 일은 그런 부정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전문가 집단이 있다는 것이고, 또 그 전문가 집단이 우리 나라 최고의 엘리트집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불의에 대항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물론 불의에 대항하면 행복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편안한 삶을 살지 못하고 싸움과 갈등의 한복판에 휘말려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불편한 일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처럼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을 통해 펼쳐지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보다 더 큰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분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를 피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록 십자가가 예수님에게는 고통이요 괴로움이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에게 유일한 생명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분입니다. 자기 행복만 추구하기 보다는 더 큰 대의를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6월 11일(화) CBS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방송원고)
* 박용태목사의 CBS 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매주 화요일 15:55 FM 103.7 MHz
박용태목사
서울의 대학가에서 학생대표기구를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학생회장을 하려는 학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선거기간에 입후보 하는 학생이 있어도 전체 투표율이 너무 낮아서 정당한 대표기구를 구성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미 여러 대학이 학생대표기구 없이 학사일정을 진행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그 기사를 쓴 기자는 요즘 대학생들이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어서 자신에게 직접 관련 있는 일이 아니라면 참여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분석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관심 있는 영역만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삶조차 무너뜨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나찌세력에 대항하던 마틴 니묄러 목사님이 쓴 <그들이 내게 왔을 때>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체포하고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 다음 그들이 나에게 들이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나서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의에 무관심한 채 자신의 행복과 개인적인 관심에만 매몰되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지를 고발하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행복보다는 대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내 행복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설령 내 행복, 내 기쁨을 포기하더라도 반드시 추구해야 할 더 가치 있는 일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 우리나라가 원전 건설과 유지 과정에서 온갖 부정과 비리가 오랫동안 저질러졌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연일 언론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원전이란 단순한 전력생산 시설이 아니라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에서 볼 수 있듯이 사고가 일어나면 그 지역 전체가 접근 불가능한 땅으로 변해 버릴 정도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처럼 엄청난 시설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비리가 저질러 진 것도 문제지만, 더 두려운 일은 그런 부정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전문가 집단이 있다는 것이고, 또 그 전문가 집단이 우리 나라 최고의 엘리트집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불의에 대항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물론 불의에 대항하면 행복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편안한 삶을 살지 못하고 싸움과 갈등의 한복판에 휘말려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불편한 일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처럼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을 통해 펼쳐지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보다 더 큰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분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를 피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록 십자가가 예수님에게는 고통이요 괴로움이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에게 유일한 생명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분입니다. 자기 행복만 추구하기 보다는 더 큰 대의를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6월 11일(화) CBS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방송원고)
* 박용태목사의 CBS 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매주 화요일 15: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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