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박용태목사님)
2013.05.29 14:05
6,413
0
0
본문
성령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박용태목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요14:18). 다시 오셔서 거처를 제자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요14:23). 그것은 항상 제자들 안에 거하시며 제자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일종의 새로운 임마누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대로 오순절날 이루어졌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예수님의 약속대로 제자들 가운데 임재 하셨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은혜를 경험한 사도들은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약속이 단지 소수의 사도들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행2:38-39). 물론 성령님이 교회 안에 임재하고 계시지만 성령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광야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늘 함께 하시면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지만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한 채 제 멋대로 구는 이스라엘백성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령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채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한 채 자기 만족과 안일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는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후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촉구합니다. 성령 충만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예수 믿는 기쁨과 행복을 충분히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지혜로운 분별력과 믿음의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생각해 보세요. 성령충만하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충분히 믿고 신뢰하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한 뒤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단히 지혜롭고 명철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특히 당시 유행하던 수사학을 배운 적도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듣는 사람들이 탄복할 만큼 조리 있고 설득력 있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행4:13).
오순절 이전에 제자들은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 제자들은 고난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심지어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채찍질을 당했지만 “예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행5:41)”고 할만큼 담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임재하신 보혜사 성령님이 이런 변화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과 18절에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누구나 성령충만한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시고 성령충만한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5월 21일(화) CBS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방송원고)
* 박용태목사의 CBS 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매주 화요일 15:55 FM 103.7 MHz
박용태목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요14:18). 다시 오셔서 거처를 제자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요14:23). 그것은 항상 제자들 안에 거하시며 제자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일종의 새로운 임마누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대로 오순절날 이루어졌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예수님의 약속대로 제자들 가운데 임재 하셨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은혜를 경험한 사도들은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약속이 단지 소수의 사도들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행2:38-39). 물론 성령님이 교회 안에 임재하고 계시지만 성령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광야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늘 함께 하시면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지만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한 채 제 멋대로 구는 이스라엘백성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령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채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한 채 자기 만족과 안일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는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후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촉구합니다. 성령 충만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예수 믿는 기쁨과 행복을 충분히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지혜로운 분별력과 믿음의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생각해 보세요. 성령충만하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충분히 믿고 신뢰하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한 뒤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단히 지혜롭고 명철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특히 당시 유행하던 수사학을 배운 적도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듣는 사람들이 탄복할 만큼 조리 있고 설득력 있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행4:13).
오순절 이전에 제자들은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 제자들은 고난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심지어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채찍질을 당했지만 “예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행5:41)”고 할만큼 담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임재하신 보혜사 성령님이 이런 변화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과 18절에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누구나 성령충만한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시고 성령충만한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5월 21일(화) CBS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방송원고)
* 박용태목사의 CBS 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매주 화요일 15:55 FM 103.7 MHz
0
로그인 후 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