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칼럼

율법주의와 경건한 삶은 다릅니다(박용태목사님)

본문

율법주의와 경건한 삶은 다릅니다.
박용태목사
초대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한 위협이 율법주의였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구원을 받으려면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또는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별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율법주의를 철저하게 배격했습니다. 율법주의를 따르는 것은 은혜의 복음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에도 율법주의가 교회 안에 만연해서 여전히 참된 은혜를 누리며 경건한 삶을 사는데 큰 장애물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가 왜 경건한 삶을 사는데 장애물이 됩니까?
율법주의는 항상 경건한 삶을 몇 가지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한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주일 예배에 참여한다든지,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을 드린다든지, 교회에서 일정한 봉사를 담당하는 것 등으로 한정하는 것입니다. 그 규칙은 대개 일반적인 전통을 따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 정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예배만큼은 빠트리지 않고 드린다는 식입니다. 자신이 설정해 놓은 그 규칙을 잘 따를 경우 스스로 만족하고 자신을 정당화 하게 됩니다. 할만큼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에 매인 사람들은 스스로 정해 둔 규정을 나름대로 잘 지키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할 수 있는 만큼 노력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혹 허물과 부족함을 지적할 경우 반발하고,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교회 생활 자체가 구체적이고 투명한 삶의 나눔이 없이 종교적 의식과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내면의 진정성을 확인 할 수 있는 길이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교회 안에서는 예배에 꼬박꼬박 참여하면서 헌금을 잘하거나 어느 정도 봉사를 하기만 해도 충분히 인정해 주는 분위기여서, 내면을 충분히 점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은 열심히 하지만 내면은 불투명하고 자신이 정해 둔 종교적 규칙을 지키는 것 외 다른 일반적인 삶의 영역에서는 세상의 기준과 흐름을 철저하게 따라가는 기형적인 기독교인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참된 경건함이란 몇 가지 정해 놓은 종교적인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경건함이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면서 종교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 등 모든 삶의 영역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헌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셨다가 삼일 만에 살아나신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점점 더 경건한 삶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참된 경건함이란 어느 정도 수준에서 만족하며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 앞에 설 때까지 끊임없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이루어가야 할 거룩한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참된 경건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할만큼 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항상 말씀의 빛 아래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겸손합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묵상하고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생각과 성품을 다듬어 갑니다. 인격적으로 성숙해 져 갑니다. 율법주의는 무서운 유혹입니다. 율법주의에 매일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따라가는 참된 경건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4월 30일(화) CBS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방송원고)
 * 박용태목사의 CBS 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매주 화요일 15:55  FM 103.7 MHz
0
로그인 후 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