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의 화해와 통합이 민족사적 사명입니다(박용태목사님)
2013.07.0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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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남북의 화해와 통합이 민족사적 사명입니다.
박용태목사
교회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구한말 복음이 처음 전해 졌을 때 교회가 그런 민족사적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열어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양반상놈과 남녀를 나누던 신분의 차별을 철폐하고 금주금연을 비롯한 절제 운동을 펼치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과 소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일제시대 교회가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한글을 가르치면서 민족혼을 지켜 내는 데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일본천황은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60-70년대 교회는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잘살아보세! 외치는 상황에서 잘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돈과 풍요로운 삶을 향해 달려갈 때 예수 믿는 사람들도 휩쓸려 버렸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가난하고 핍박 받는 자리에 함께 서 있을 때는 세상의 등불 역할을 잘 감당했는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돈과 권력 같은 사회적 영향력을 손에 쥐면서부터는 세상의 손가락질을 당하는 자리에 서고 말았습니다.
우리 시대 민족사적인 사명은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민족의 하나됨을 위해 특히 헌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동기야 어떻든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를 정도로 누구나 통일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풍토가 있었습니다. 흡수통일이냐 점진적인 평화통일이냐 논쟁이 일부 있었지만 통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보면 통일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통일비용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북한을 끌어안으려면 돈이 많이 들고, 세금을 더 내어야 하니 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누가 만일 통일비용을 걱정한다면 통일비용보다 분단 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더욱이 통일비용이라는 것은 아무리 많이 들더라도 생산적인 투자비용입니다만 분단비용은 낭비되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총과 대포, 미사일은 아무리 많아도 전쟁이 아니면 쓸모없는 것입니다. 총과 대포를 사용하려고 일부러 전쟁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통일이라는 민족사적인 사명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 전에 이사야서 58장에서 이런 말씀을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이 말씀이야말로 북한에 대하여 적용해야 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오늘날 모든 것을 돈과 관련하여, 경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돈보다 더 중요한 문제, 경제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분단의 굴레를 짊어지고 고통당하는 이 땅의 눈물과 얽매인 영혼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통일과 민족의 하나 됨이야말로 모든 경제적 타산을 뛰어넘어 우리가 이루어내어야 할 역사적 사명인 것입니다. (7월 2일(화) CBS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방송원고)
* 박용태목사의 CBS 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매주 화요일 15:55 FM 103.7 MHz
박용태목사
교회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구한말 복음이 처음 전해 졌을 때 교회가 그런 민족사적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열어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양반상놈과 남녀를 나누던 신분의 차별을 철폐하고 금주금연을 비롯한 절제 운동을 펼치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과 소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일제시대 교회가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한글을 가르치면서 민족혼을 지켜 내는 데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일본천황은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60-70년대 교회는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잘살아보세! 외치는 상황에서 잘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돈과 풍요로운 삶을 향해 달려갈 때 예수 믿는 사람들도 휩쓸려 버렸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가난하고 핍박 받는 자리에 함께 서 있을 때는 세상의 등불 역할을 잘 감당했는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돈과 권력 같은 사회적 영향력을 손에 쥐면서부터는 세상의 손가락질을 당하는 자리에 서고 말았습니다.
우리 시대 민족사적인 사명은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민족의 하나됨을 위해 특히 헌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동기야 어떻든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를 정도로 누구나 통일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풍토가 있었습니다. 흡수통일이냐 점진적인 평화통일이냐 논쟁이 일부 있었지만 통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보면 통일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통일비용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북한을 끌어안으려면 돈이 많이 들고, 세금을 더 내어야 하니 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누가 만일 통일비용을 걱정한다면 통일비용보다 분단 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더욱이 통일비용이라는 것은 아무리 많이 들더라도 생산적인 투자비용입니다만 분단비용은 낭비되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총과 대포, 미사일은 아무리 많아도 전쟁이 아니면 쓸모없는 것입니다. 총과 대포를 사용하려고 일부러 전쟁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통일이라는 민족사적인 사명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 전에 이사야서 58장에서 이런 말씀을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이 말씀이야말로 북한에 대하여 적용해야 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오늘날 모든 것을 돈과 관련하여, 경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돈보다 더 중요한 문제, 경제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분단의 굴레를 짊어지고 고통당하는 이 땅의 눈물과 얽매인 영혼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통일과 민족의 하나 됨이야말로 모든 경제적 타산을 뛰어넘어 우리가 이루어내어야 할 역사적 사명인 것입니다. (7월 2일(화) CBS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방송원고)
* 박용태목사의 CBS 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매주 화요일 15: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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