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칼럼

바리새인을 생각한다.(이구집사)

본문

바리새인을 생각한다.
이 구 집사

영화나 TV 드라마 혹은 소설을 읽을 때에 우리는 흔히 주인공의 관점을 갖는다. 그 이야기가 선악간의 대결 구도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주인공이 고난을 받을 때에는 도리어 그 주인공 보다 더 분노하며, 그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몰락하게 될 결말을 내내 기다린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러하다. 누군가 억울한 일을 당한 일이 인터넷에라도 알려지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름 심판자가 되어 선악을 순식간에 결정짓고, 또한 어떤 이들은 정의의 사도가 되고 혹은 응징자가 되어 오지랖을 넓힌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여간해서는 반대편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아니 적어도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다. 왜냐 하면 자신은 사리를 밝히 분별하고 올바른 생각을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괴롭히며 제자들의 행동을 낱낱이 지켜보며 온갖 트집을 잡는 바리새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분을 사며 엄청난 비난을 받아왔다. 개인의 욕심과 집단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이었으며, 고루한 율법주의에 빠져 예수님을 헐뜯으려만 했던 이기적인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이분법으로 복음서를 이야기처럼 술술 읽는 것 외에, 목사님의 강론을 듣고 몇가지 참고도서를 접하며 나는 의외의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서 구원의 역사에서 당연히 제외될 것이라 여겨졌던 그들, 바리새파 사람들은 신구약 중간기, 그러니까 선지자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도 임하지 않았던 어둠의 시대에 성경으로, 율법으로 돌아가자며 유대민족을 계몽했던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집단이 온통 트집 잡는 사람들로 가득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거듭남에 대해 예수님께 물었고, 나중에 예수님을 변호하며, 후에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을 장사 지냈던 니고데모가 바리새인이었다. 그리고 극렬한 열심분자였지만 회심하여 사도가 된 바울도 그러했다. 아마도 바리새파 사람들 중에도 사회적 위치로 인해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심정적으로는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성경 중심의 운동이 율법주의로 변질되고, 세속적 사회에서 구별되려 했던 의도가 폐쇄적 집단주의로 흐르고 말았지만, 그들에게는 열심과 일관성을 위한 노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그들의 완고함을 싫어하지만 기독교적 삶에 대해서는 감각이 없는 사람들. 예수님의 입장에 있는 것 같지만 그분께 부정적인 사람들에게 변증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아가 예수님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라 바리새인을 비난하지만, 사람들을 그분께 인도하는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그 길을 막아서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
우리는 열심과 일관성을 갖지 못하면서도 주인공 편에 서서 악인이 몰락하는 결말을 편안하게 기다리는 시청자 혹은 독자와도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본다.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국의 교회와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지식의 저변이나 혈기가 아니고 삶의 작은 부분에서라도 배척받으신 예수님의 제자임을 증거할 수 있는 매일의 결단과 용기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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