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에 대항하는 것도 교회가 할 일입니다(박용태목사님)
2014.01.02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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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불의에 대항하는 것도 교회가 할 일입니다.
박용태목사
요즘 우리교회 성도들과 함께 구약성경 여호수아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가 강조하는 것은 절대로 수용하거나 배우거나 타협해서는 안되는, 그래서 진멸하기까지 싸워야하는 악한 문화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은 욕망의 무한충족을 목표로, 경쟁하고 다투는 것을 정당화 하는 방탕하고 폭력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당연시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괴로움과 탄식이 그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사람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가나안을 허물어트린 후 그 자리에 이웃에 대한 배려와 자기희생과 섬김의 정신으로 무장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불의에 대항하는 거룩한 공동체였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을 진멸하기보다는 힘으로 제압하고, 하기 싫은 일을 시키면서 부려먹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통치할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가나안의 폭력적이고 불의한 문화, 가나안의 방탕함을 고스란히 따라갔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역사는 멸망으로 끝나 버립니다.
여호수아서를 읽으면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비추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생각할 때,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만 내면은 이미 가나안땅의 이스라엘과 같이, 세상의 종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지 부끄러운 마음이 밀려 올 때가 있습니다.
경쟁과 폭력과 다툼을 정당화 하는 것으로 보자면 우리 사회는 가나안을 이미 뛰어 넘는다고 하겠습니다. 음란함과 방탕함은 말할 것도 없고, 욕망의 충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도 가나안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공공연히 불의를 행하는 세력들이 날뛰고 있지만, 정의와 공의의 원칙을 가지고 대항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합니다. 교회가 많고 기독교인들의 세력이 무시할 수 없는 정도라고는 하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 세상의 불의에 대항할 만한 힘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교회를 통해서 불의한 세력이 힘을 얻고 그 와중에 교회 역시 사회적 폭력과 불의의 한 축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역사 가운데 교회가 사회적 불의를 공공연히 편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정권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승만 정부 시절입니다. 당시 교회는 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이승만 전 대통령을 이 민족을 위해 보낸 모세처럼 떠받들었습니다. 이승만정권이 불의한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온갖 못된 일을 저지를 때, 공개적으로 그를 지지하는 선거운동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315부정선거의 주역들 중에 교회에 적을 둔 집사, 권사,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 국사편찬위원장이 되신 분은 이승만전대통령을 세종대왕과 같은 DNA를 가진 분이요 우리 역사에서 콘스탄틴대제와 같은 역할을 한 분이라고 추켜세웠다고 하는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사야 5장 20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별하고, 불의에 대항할 줄 아는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12월 10일(화) CBS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방송원고)
* 박용태목사의 CBS 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매주 화요일 15:55 FM 103.7 MHz
박용태목사
요즘 우리교회 성도들과 함께 구약성경 여호수아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가 강조하는 것은 절대로 수용하거나 배우거나 타협해서는 안되는, 그래서 진멸하기까지 싸워야하는 악한 문화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은 욕망의 무한충족을 목표로, 경쟁하고 다투는 것을 정당화 하는 방탕하고 폭력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당연시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괴로움과 탄식이 그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사람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가나안을 허물어트린 후 그 자리에 이웃에 대한 배려와 자기희생과 섬김의 정신으로 무장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불의에 대항하는 거룩한 공동체였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을 진멸하기보다는 힘으로 제압하고, 하기 싫은 일을 시키면서 부려먹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통치할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가나안의 폭력적이고 불의한 문화, 가나안의 방탕함을 고스란히 따라갔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역사는 멸망으로 끝나 버립니다.
여호수아서를 읽으면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비추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생각할 때,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만 내면은 이미 가나안땅의 이스라엘과 같이, 세상의 종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지 부끄러운 마음이 밀려 올 때가 있습니다.
경쟁과 폭력과 다툼을 정당화 하는 것으로 보자면 우리 사회는 가나안을 이미 뛰어 넘는다고 하겠습니다. 음란함과 방탕함은 말할 것도 없고, 욕망의 충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도 가나안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공공연히 불의를 행하는 세력들이 날뛰고 있지만, 정의와 공의의 원칙을 가지고 대항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합니다. 교회가 많고 기독교인들의 세력이 무시할 수 없는 정도라고는 하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 세상의 불의에 대항할 만한 힘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교회를 통해서 불의한 세력이 힘을 얻고 그 와중에 교회 역시 사회적 폭력과 불의의 한 축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역사 가운데 교회가 사회적 불의를 공공연히 편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정권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승만 정부 시절입니다. 당시 교회는 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이승만 전 대통령을 이 민족을 위해 보낸 모세처럼 떠받들었습니다. 이승만정권이 불의한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온갖 못된 일을 저지를 때, 공개적으로 그를 지지하는 선거운동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315부정선거의 주역들 중에 교회에 적을 둔 집사, 권사,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 국사편찬위원장이 되신 분은 이승만전대통령을 세종대왕과 같은 DNA를 가진 분이요 우리 역사에서 콘스탄틴대제와 같은 역할을 한 분이라고 추켜세웠다고 하는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사야 5장 20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별하고, 불의에 대항할 줄 아는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12월 10일(화) CBS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방송원고)
* 박용태목사의 CBS 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매주 화요일 15: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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