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칼럼

더불어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박용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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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스포츠에 비유한다면 개인적인 아니라 단체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포츠경기 중에는 권투나 골프처럼 개인적 능력이 중요한 경기가 있는가 하면 축구나 야구, 농구처럼 여러 선수들의 개인기뿐만 아니라 팀워크가 중요한 경기가 있습니다. 팀워크가 중요한 경기에서는 아무리 개인기가 탁월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남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때문에 경기에서 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달리기와 같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라고 하는데, 여러 선수들이 바통을 서로 이어 받으면서 달리는 릴레이, 계주를 의미합니다. 앞서 달려간 선수와 뒤 따르는 선수 각자에게 맡겨진 구간이 있습니다. 앞 사람의 바통을 잘 넘겨받아 뛰고 난 후 뒤 이은 선수에게 바통을 제대로 넘겨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거룩한 공회’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더불어 살아가는 팀워크, 주변에 있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누리는 가장 큰 즐거움은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 나타납니다. 사랑과 관심은 자연스레 우리 주변, 가정과 교회를 넘어서 사회와 온 땅 모든 민족에게까지 확장됩니다.
신비주의의 문제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신비한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더 강력한 영적 체험을 위해 더 개인적인 삶에 몰입하기 쉽습니다. 영적인 삶을 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과 멀어지고 공동체적 책임을 나누지 않고 결국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주변 사람 돌아보는 책임을 약화시키는 것은 성경적 교훈이 아닙니다. 주변에 연약하고 특히 못된 사람이 있을 때 그를 외면하고 내 갈 길을 가고 싶은 유혹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외면한 채 내 갈 길만 간다면 그 길은 결국 우리를 지옥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천국은 용서받은 죄인들이 서로 용납하며 살아가는 곳입니다. 악한 사람이라고 내치고, 못된 사람이라고 해서 외면한다면 훌륭하고 멋진 사람인들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은혜와 사랑이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을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레가 성탄절인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대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죄인을 끌어안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또 용서와 용납은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요 또 용서와 용납이란 그런 아픔을 겪으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날이기도 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 안에 용서와 용납, 더불어 살아가는 힘이 계속 약화되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과 무관심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이는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통합진보당을 지지하거나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거짓말에 익숙한 권력이 우리사회를 더 편협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없다면 행복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서 찬송’하는(계7:9) 천국은 더불어 살아가는 곳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연습을 계속해야 합니다.
(12월 23일(화) CBS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방송원고) 
* 박용태목사의 CBS 전북방송 크리스천칼럼 매주 화요일 15: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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